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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투데이가 지난해 이어 2020 정조대상 시상식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정조 대왕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이산(정조대왕)은 1752년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이며,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정한 정치판에서 끝내 할아버지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영조의 서슬 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함께 외갓집으로 내려 가지만 곧 혜경궁홍씨와도 생이별해 경희궁으로 돌아간다. 이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에게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생이별은 오히려 혜경궁홍씨의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다. 어린 정조가 생모와 떨어지기 싫어해서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 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혜경궁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정조를 떼어놓았다고 한다. 영조의 그 정신 나간 수준의 망상장애 결과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 왕세손 시절에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극진하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다르게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사도세자를 찾지 않아도 원손인 정조는 영조가 심심하면 불러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게 하는 등 편애를 했고,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일부러 흠을 잡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잘했는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으나 영조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살아남아서 왕위에 오르려면 영조에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임오화변 이후 출궁되었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올 때 정조는 11세였다. 아버지를 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기는 했어도 죄인의 아들로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을 거라 판단한 영조에게 죽은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어떠한 방향으로든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또 정조는 대단한 독서광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사관이나 승지들이 적절한 인용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으면 정조는 "어느 책 몇 쪽 몇 번째 줄에 뭐라 되어 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어느 책의 몇 쪽에 몇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 적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신하들이 확인하여 직접 원문을 찾아봤는데, 왕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사례는 서애 류성룡, 율곡 이이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조가 신하들과 다르게 군주로서 하루종일 격무에 시달리며 바쁜 사람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영조가 나이가 연로하여 업무를 수행하기 힘들어서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 나이로 조선 22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즉위 한 다음날 어제봉안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을 그해 9월에 준공하여 역대 왕의 문적을 수립해 보관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책 등을 수장하였으며, 더욱 청나라 건륭문화에 마음을 기울이며 학문연마에 주력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즉위에 방해하였던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더 나아가 정조의 총애를 빙자하여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됨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을 다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철천지한으로 여겨, 등극하자 그 당시의 간신들을 처벌하고,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이장하고 석물을 어느 왕릉보다도 훌륭하게 만들었으며, 매월 원소에 거동하였고, 또한 경모궁을 세워 세자의 사당으로 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여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대궐 안에 있는 월근문은 당시 왕이 거동하던 기념문인 것이다. 이뿐이 아니라 왕은 애처롭게 돌아가신 사도세자를 사모하여 항상 눈물로 베개를 적시었다고 한다. 세자묘를 현륭원이라 이름하고 왕이 한강을 건너 원소로 갈마다 길이 더디다하여 지지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번은 원소에 송충이가 만연하여 솔잎을 좀먹으므로, 왕은 송충이 몇 마리를 잡아오라 하여 삼키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벌레이기로서니 친산의 솔잎을 긁어먹을 수가 있느냐? 차라리 내 오장을 먹으라."하는 것이었다. 좌우의 군신들이 대경실색하였으나 정조의 효심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날부터 솔개와 까마귀가 무수히 덤벼 송충이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정조는 무참히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하여 무한히 슬퍼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정조대왕의 업적은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속모제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강,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각운, 오륜행실 등을 편찬했고,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학이 발달 되었고, 양반, 증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킴으로 문예부흥정책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성공한 개혁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수원에 화성행궁을 건설 하였으며,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강화에 힘을 섰을 뿐만 아니라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파당을 배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며, 인재를 통하여 혁신정치를 펼치며 선진문화를 마련했다. 그밖에도 왕실 재산으로 백성을 구제하는데 사용 했으며, 법과 정의를 확립하고, 신해통공의 시장경제를 활성화 하였으며, 노예제도 폐지를 추진하였다.
즉위 후 수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노련하게 개혁과제를 실천하였으며, 재위기관 동안 정치권력의 균형을 잘 이용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정조대왕은 젊은 나이에 지병을 알고 있던 종기가 다시도저 서기 1800년 6월, 49세로 세상을 마쳤다. 가족관계 효의왕후를 비롯하여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효의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며, 선빈성씨가 문효세자를 낳고, 수빈박씨가 세자공(순조)과 숙선공주를 낳았다. 정조의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에 있다. 대한제국 성립 후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이들 중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음으로 수빈박씨 소생 세자공이 정조대왕 이어 제23대 순조가 되었다. 우리는 정조대왕의 과거를 벗어나 개혁을 할 때 겪어야 했던 크고 작은 저항과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사회 면모를 보는것 갔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히 일어나 조선의 대왕이 되기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대왕의 자리를 지켜 낸 개혁군주 이산(정도대왕)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운 사상과 후세에게 물려준 효도하는 마음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